새로운 옷, 새로운 기계, 새로운 물건.. 새로운 것들이 마구마구 쏟아져 나오는 시대, 언박싱과 하울이 하나의 콘텐츠가 되어버린 시대에 어떤 것을 '오래 쓴다는 것'은 누군가는 구질구질하게 느낄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멋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제가 그랬어요. 얼마 전 인터넷에서 소프라노 조수미님의 13년 된 2G폰, 20년 된 여행용 캐리어를 소개하는 글을 보고 물건 하나를 이렇게 소중하게, 오래 쓰는 일은 정말 멋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나에게도 있는 오래된 친구들도 새삼스럽게 생각해보기로 했지요. 그들과 내가 보낸 시간들을.
첫번째 친구를 소개할게요. 이 친구는 제가 자취를 처음 시작할 때, 엄마의 찬장에서 가져온 것이에요. 한국도자기에서 만든 예쁜 커피컵 세트예요. 엄마에게 물어보니 의정부로 이사왔을 때 산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2000년에 구매한 것이니, 벌써 23년이나 된 친구군요. 저는 주로 여기에 믹스커피나 홍차를 마십니다. 색도 제가 좋아하는 색들만 있어서 제가 아주 좋아해요.
두번째 친구는 바비브라운의 파우더 브러쉬예요. 제가 대학교를 입학 할 때 엄마가 처음 사주신 화장 도구이기도 하고, 제 인생 첫 화장 도구이기도 하죠. 12년 동안 아주 잘 쓰고 있어요. 요즘엔 화장을 잘 하지 않아서 제 얼굴을 보송하게 해주는 마법의 가루를 이 친구로 아주 잘 토닥토닥 해주고 있답니다. 이 친구는 숱이 많아서 씻기고 나면 오래 잘 말려줘야해요.
세번째는 나이키에서 나왔던 아스날 져지예요. 정확히 기억은 안나는데 아마 09-10 시즌 져지였던 것 같아요. 이 때는 스마트폰도 없고 유투브도 활성화 되어 있지 않아서, 집에서 tv로 새벽에 스타크래프트1 경기를 보거나 해외 축구를 보곤 했죠.. 14년이나 입었네요. 동생과 함께 구매했었는데 동생은 학교 가방에 묶고 다니다가 잃어버렸어요. 그래서 아직도 제 져지를 부러워한답니다... 여기저기 잘 입고 다녀요. 산책할 때, 집에 그냥 있을 때, 청바지에 가볍게 걸치기도 하고요. 제가 생각해도 깨끗히 잘 입은 것 같아요.
네번째도 옷인데요, 19살 때 수시 때문에 대학교 면접을 본 날이었어요. 서울이어서 가족들이 총 출동 해주었었죠... 제가 면접 볼 동안 엄마 아빠는 학교 앞 가게에서 생맥주를 마셨어요. 면접이 끝나고 집에 가야하는데 아빠가 수고했다고 하나 골라보라며 저는 이름도 모르는 가게에 들어가서 옷을 고르게 되었어요. 나중에 보니 mlb였고 그 때도 가격이 되게 비쌌어요.. 13년 동안 이 옷 보다 비싼 아우터는 사본적이 없는 것 같아요. 아빠가 취한김에 저도 한탕 고른듯 합니다. 아무튼 이 친구는 여전히 환절기 때마다 저의 든든한 겉옷으로 함께 하고 있답니다.
마지막은 이 친구예요. 제가 중학교 다닐 때 한창 힙합 앨범을 즐겨 들었었는데, 그 때 구매했던 CD 플레이어예요. 아직도 잘 작동하고 있답니다. 언제 구매했는지 정확히 기억이 안나 앞에 적혀 있는 모델명을 쳐봤는데, 2006년에 나온 모델이군요. 딱 제가 열심히 힙합을 듣던 바로 그 시기예요. 벌써 17년이나 지났네요... AA건전지 두개만 있으면 모든 음악을 다 들을 수 있답니다. 아직도 집에 책장 한칸을 차지 하고 있는 제 CD들을 이걸로 가끔 듣곤 해요. 줄 이어폰으로 듣는 생생한 음악. 짱입니다.
함께한지 10년이 넘는 친구들을 새삼스레 생각해보고 추억해보니 정말 재밌었어요. 여전히 나와 함께 해주어서 고맙기도 했고 앞으로도 더 관리를 잘해서 20년 까지도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마구마구 생겼어요. 그리고 또 새롭게 10년,15년이 된 친구들을 소개할 나중을 생각하니 내 물건들을 더 소중하게, 아껴주어야 겠다고 생각했죠.
모든 것이 더 빠르게 만들어지고 버려지는 요즘.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에게도 저처럼 이렇게 오래된 친구들이 있나요? 오늘 한 번 슬쩍. 첫 만남을 떠올리며 말 걸어 보는 건 어때요?